시그마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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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발표된 하나의 보고서가 일본 정부를 발칵 뒤집어 놓게 됩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1990년에 약 25만명, 2000년에는 약 97만명의 소프트웨어 기술자가 부족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응이 시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일본의 통상산업성(통산성, 현재는 경제산업성)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단기간에 많은 소프트웨어 기술자를 양성할 수 있는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1984년 통산성은 SRA(Software Research Associates, Inc.)의 대표였던 키시다 코우이치(岸田孝一)를 찾아갑니다. 키시다는 1960년대 일본의 여러 기업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인물로 당시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소프트웨어 전문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입안자로 내세워서 하나의 국가 프로젝트를 시동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시그마 프로젝트(Σ計画)』입니다.
일본은 고도성장기에 통산성이 주도하는 국가 프로젝트를 통해서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통산성이 프로젝트를 만들고, 여기에 기업들이 참여하고, 국가에서는 예산을 투입해서 기업을 키우는 동시에 국가 경쟁력도 키워나가는 국가주도형의 산업 구조였던 것입니다. 특히 통산성이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주도했던 『VLSI프로젝트』는 740억엔의 예산이 투입된 초대형 프로젝트였는데, 이것이 크게 성공하면서 일본은 전자제품의 부품산업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VLSI프로젝트』의 지나친 성공으로 인해 통산성은 1980년대에 정부주도로 정보통신 분야의 독자규격을 확립하기 위한 정부주도의 프로젝트(일명 히노마루 프로젝트라고 불립니다)를 입안해 수천억의 예산을 쏟아부었고, 이것들이 단 하나도 성공하지 못함으로서 버블붕괴 후에 일본의 IT산업이 경쟁력을 크게 잃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당시의 유명한 정부 주도 IT프로젝트들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프로젝트명 기간 주도기관 예산 성과
VLSI 프로젝트 1976~1979 통산성 740억엔 성공
슈퍼컴퓨터 1981~1989 통산성 180억엔 일부상품화
제5세대 컴퓨터 1982~1992 통산성 540억엔 상품화 실패
아날로그 하이비젼 1983~? 우정성 ? 시험방송만
캔틴 시스템 1984~2002 우정성 ? 서비스 중지
BTRON 프로젝트 1984~1989 통산성 ? 실패
시그마 프로젝트 1985~1990 통산성 250억엔 실패

 

제5세대 컴퓨터: 1982년 IBM산업스파이사건을 계기로 미국 기업의 표준 규격에 의존도가 높은 일본의 컴퓨터 제조사들의 한계가 드러나자, 독자적인 컴퓨터 규격을 확립하기 위해 시동된 프로젝트. 인공지능, 자연어 처리 등 당시로서는 실현 불가능했던 여러 기능을 요구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실패한 프로젝트.
아날로그 하이비전 프로젝트: 기존의 아날로그 텔레비전보다 월등한 화질의 영상을 전송하기 위해 일본 독자적으로 만들었던 규격. 디지털방송 규격이 확립되면서 시험방송 단계에서 중단되었다.
캡틴 시스템: 전용 단말기를 아날로그 전화 회선에 연결해 텔레비전에 문자나 이미지 등을 이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통신 서비스. 인터넷의 보급으로 90년대에 와서는 대부분의 컨텐츠 사업자가 손을 떼고, 2002년에 와서 서비스 자체가 중단되었다.
BTRON 프로젝트: 일본 정부가 주도한 교육용 컴퓨터 통일 규격 프로젝트. 1984년 도쿄대의 사카무라 켄(坂村健)이 고안한 리얼타임OS 규격인 TRON의 PC용 OS규격이었던 B-TRON을 메인 OS로한 일본 독자의 교육용 컴퓨터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 다양한 컴퓨터 업체를 끌어들여서 시작했지만 마츠시타 이외에는 실질적인 개발을 진행한 기업이 없었다. 1989년 미국이 슈퍼301조를 근거로 일본의 컴퓨터 메이커들을 위협하자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기업들이 모두 이를 핑계로 손을 떼면서 프로젝트는 사실상 중지되었다. TRON OS 자체는 이후로도 많은 서브프로젝트가 진행되어 일본의 IT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일본산 피쳐폰의 대부분이 TRON OS를 베이스로 하고 있다.
IBM산업스파이 사건: 미국 IBM이 System/370-XA의 OS 기능 일부를 펌웨어에 내장하기로 하면서 호환기 개발에 위기감을 느낀 히타치와 미츠비스 전기 등의 직원 6명이 산업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사건.

 

시그마 프로젝트의 목표는 크게 2가지였습니다. 부족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단기간에 대량 양성하는 것, 그리고 파편화된 시스템에 의해 특정 시스템 운영에만 익숙해 다른 시스템을 사용하려면 상당기간의 교육이 필요하게 되는 소프트웨어 기술자 운영의 비효율성을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모든 소프트웨어 기술자가 사용할 수 있는 통일된 규격과 이것을 만드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독자적인 OS”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키시다는 당시 미국의 소프트웨어 산업이 기업, 연구소, 개인 개발자 등의 활발한 의견 교환과 소스 공유 등을 통해서 발전해온 것에 착안해 일본에서도 소프트웨어 개발자간의 유기적인 정보교환을 가능하게 한다면 자연스럽게 통일된 규격이 확립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BSD 유닉스 기반의 독자적인 OS의 개발과 모든 소프트웨어 기술자가 자유롭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국가 규모의 네트워크망 구축을 골자로 하는 시그마 프로젝트의 초안을 내놓습니다. 키시다의 말을 빌리자면 “풀뿌리 정신에 기반한 자연발생적인 통일 규격”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자는 것입니다. 시그마란 “모든 것을 통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시그마 프로젝트의 결과로 만들어질 성과물의 중요성보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보다 고도의 기술을 다수의 개발자들에게 이식하는 과정에서 시그마 프로젝트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면 아시겠지만, 키시다의 초기 구상은 현재의 리눅스에 가까운 형태입니다. 모두가 자유롭게 이용 가능한 OS 커널의 개발, 오픈 소스화, 자유로운 개발 정보 공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네크워크망 등. 1984년에 이러한 구상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키시다의 구상대로 시그마 프로젝트가 실현되었다면 컴퓨터 산업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통산성의 입맛에 맞지 않는 구상이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통산성은 국가 주도 프로젝트를 입안하고, 이것에 참여한 기업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해서 산업경쟁력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일본 경제를 성장시켜왔습니다. 키시다의 구상에는 기업이 배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키시다의 구상은 다분히 연구 개발 활동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단기간에 달성해야 하는 목표 설정이 불명확했습니다.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었고요. 이에 시그마 프로젝트는 기업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우선 독자적인 OS를 개발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고, 이를 위한 하드웨어 규격을 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규격에 맞춘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정부 예산으로 기업들로부터 대량으로 구매하게 됩니다. OS의 근간이 되는 유닉스 시스템도 기업간의 이해관계 때문에 BSD가 아닌 SYSTEM V 기반으로 바뀌어 버립니다.(당시 일본은 유닉스 사용자 대부분이 BSD 사용자였습니다)
통산성에서는 컴퓨터 하드웨어의 발전은 더이상 어렵기 때문에 소프트웨어 개발에 몰두한다는 것을 전제로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서 실체가 불분명한 시그마 프로젝트는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합니다. 이 시점에서 초안을 만들었던 키시다는 프로젝트에서 빠지게 됩니다. 키시다는 이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당초 통산성 관료의 머리 속에서는 그렇게 모순된 점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몇번이나 논의를 거치면서 저도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메인프레임 메이커의 소프트웨어 부문이야말로 일본의 정보통신 산업의 중핵이며, 이를 통해 축적된 “우수한 기술”을 아직 “빈약한” 소프트웨어 메이커에게 이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믿고 있었으니까요. 」

키시다의 초안을 바탕으로 통산성이 수정한 시그마 프로젝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시그마 프로젝트의 요건을 만족시키는 시그마OS를 개발하고, 이 시그마OS 위에서 돌아가는 각종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플리케이션 개발 중에 만들어진 모듈을 부품화 하여 정부 산하 기관이 관리하는 센터의 저장소에 보관하고, 누군가가 시그마 OS 기반으로 새로운 어플리케이션을 만들고자 할 때는 개발된 모듈을 자유롭게 이용해서 소프트웨어 개발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듈만 이어붙이면 소프트웨어 개발이 가능하게 하고, 이것을 시그마 OS의 기본적인 조작법만 익히면 누구든지 가능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제조업적인 발상으로 프로그램 모듈을 트렌지스터와 같은 전자 부품으로, 소프트웨어 기술자를 공장의 트렌지스터 조립공으로, 소프트웨어 개발을 공장의 벨트 컨베이어가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시그마 프로젝트는 통합 규격하의 소프트웨어 부품화 계획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구상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에게는 부정적이었습니다. 당시만해도 오픈소스라는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고,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는 회사의 자산이자 생명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전부 공유한다는 공산주의적 발상에 실질적으로 소프트웨어 개발에 참여해야 할 기업들은 매우 소극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당시의 시그마 프로젝트에 대하여 정리한 일본인 개발자의 글을 보면 그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계획은 놀라울 정도로 컴퓨터는 이 이상 발전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어쨋든 시그마 프로젝트의 요지는 소프트웨어의 부품화와 그것의 집중관리에 있었다. 전국의 시그마 워크스테이션으로 만들어진 소프트웨어 부품을 통산성내에 구축이 예정된 거대 서버에서 일원관리, 공급하는 것이다. 어제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뿐인 청소년이라도 그 부품을 전자블럭과 같이 조립하는 것만으로 프로그램이 만들어진다고, 프로그래머는 공원과 다름없어지는 거에요, 보라고 소프트웨어 기술자는 전혀 부족하지 않잖아! 그런 계획이었다.
이 계획대로라면 그러한 부품으로서의 소프트웨어가 통산성의 호스트에 자연스럽게 모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떤 바보가 자신이 만든 소프트웨어를, 그것이 부품으로서 사용되어 앞으로 경쟁 상대가 될 적을 위해서 무상으로 제공할까?
통산성 관료는 출세하고, 하드웨어 메이커는 시그마 워크스테이션을 만들어서 팔고, 우리들 프로그래머는 굶어 죽는, 나중에 부품을 조립하는 공장노동자로서 싼값에 고용해주겠다는 그런 계획이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통산성에서는 시그마 프로젝트 관련의 다양한 정부 주도 안건을 만들어서 기업들에게 나눠주기식 예산 집행을 하게 됩니다. 외형적으로는 시그마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기업이 늘어났고, 시그마라는 이름을 단 여러 프로젝트가 왕성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시그마 프로젝트의 규격에 따른 제품들이 시장에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워크스테이션 제품들은 모두 만족할만한 성능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기업들도 요건을 만족시켜 예산을 따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시그마 워크스테이션은 그냥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할 뿐이었습니다. 시그마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한 소프트웨어 개발사의 대표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할 정도입니다.
「시그마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평범한 컴퓨터를 쓰는 편이 100배 빠르다.」
성과가 나오지 않자 일본 정부에서는 가시적인 성과 보여주기를 하게 됩니다. 지방 자치단체에 시그마 워크스테이션을 강제로 구입시키고, 시그마 프로젝트와 전혀 관계가 없는 제품에 시그마라는 이름을 붙이면 보조금을 지급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사례로 대표적인 것이 소니에서 출시된 시그마 스테이션(ΣStation)이라는 이름의 워크스테이션입니다. 소니는 본래 시그마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그마와 별 관계가 없었고, 소니의 워크스테이션은 BSD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독자적 운영체제인 News OS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제품에는 시그마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제품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대형 경기장의 전광판 제어용으로 현역 구동되었다고 합니다.
시그마 프로젝트는 1990년4월에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50여개 기업이 공동 출자해 시그마 시스템이라는 회사를 설립하면서 프로젝트의 주체가 민간으로 이관됩니다. 다음해인 1991년3월에는 시그마 시스템이 유닉스 국제표준에 참여하게 되면서 일본 독자의 규격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1992년3월에 시그마 프로젝트의 거점이던 계산기 센터가 패쇄됩니다. 1995년에는 시그마 시스템마저도 해산하게 되면서 시그마 프로젝트는 완전히 종막을 고하게 됩니다.
1990년12월에 발간된 닛케이 컴퓨터 지면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립니다.
「시그마 계획의 총결산 – 250억엔과 5년을 건 국가 프로젝트의 실패 」
1992년에 니혼케이자이 신문에 실린 시그마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 기사에는 약 218억엔의 국가 예산이 투입되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시그마 프로젝트는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약 5년 동안에 걸쳐서 218억~250억엔의 국가 예산이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였지만, 이렇다할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는 오랫동안 일본의 IT업계에서는 터부시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기업들이 관여되었고, 당시 업계에서 시그마 프로젝트의 예산을 받아 쓰지 않은 회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인지 시그마 프로젝트는 2000년대에 와서도 그 실체조차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채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버립니다.
통산성은 2000년에 와서야 시그마 프로젝트의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공중분해된 250억엔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90년대 말부터 크게 부족해진 일본의 소프트웨어 기술 인력의 공백을 채워준 것은 한국, 중국, 인도, 베트남 등에서 수입된 외국인 개발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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