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 American Video game crash of 1983, 일명 ‘아타리 쇼크’
「아타리 쇼크」란 1982년 크리스마스 시즌 직후 미국 비디오 게임 시장의 갑작스러운 붕괴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다. 이 사건은 흔히 「게임 시장에 조악한 품질의 소프트웨어가 범람하는 것을 막지 못해 유저들이 게임 시장으로부터 등을 돌려 시장이 붕괴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아타리 쇼크」에 대해 상당히 큰 오해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타리 쇼크」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장기간에 걸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종합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서구권에서 이 사건을 부르는 정확한 명칭은 「North American Video game crash of 1983(1983년의 북미 비디오 게임 붕괴)」이다. 「아타리 쇼크」라는 용어는 의외로 이 사건이 있고 한참이 지난 1989년에 가서야 만들어진 것이다. 그 계기는 1989년에 벌어진 아타리와 닌텐도의 재판이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아타리는 아타리게임즈로 사명을 바꾸어 계속해서 영업을 하고 있었고, 「건틀릿」이나 「마블 매드니스」 등의 히트작을 계속 내놓고 있었다. 1983년부터 이어져온 실적 악화는 1985년에 최저점을 찍었고, 이 때 워너는 아타리의 경영권을 매각하게 된다. 이때 아타리의 경영권을 산 것이 바로 남코였다. 남코는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아타리의 경영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타리는 1989년에 닌텐도가 북미 시장에서 서드파티가 제작한 NES용 소프트의 아타리 하드웨어로의 제작을 금지하는 정책이 아타리 하드웨어의 판매 부진의 원인이라며 닌텐도를 고소한다. 이에 닌텐도는 NES가 발매되기 이전의 비디오 게임 시장을 데이터화 한 자료를 제시해 아타리의 실적 악화와 비디오 게임 시장이 일시적으로 붕괴된 시기가 일치하는 것을 근거로 아타리 하드웨어가 팔리지 않는 것은 아타리의 정책에 문제가 있었음을 주장했다. 이 재판 과정에서 생겨난 말이 바로 「아타리 쇼크」다. 아타리가 시장에서 사라진 것에 대해서 특정한 사건이 있었다는 인식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1989년의 재판을 계기로 일본인들에게 「아타리 쇼크」라는 개념이 자리잡게 된다.
1989년 당시 닌텐도와 남코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어 있었고, 특히 남코는 닌텐도의 독점 계약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다. 이 때문에 남코는 닌텐도에게 소프트웨어 독점 공급하는 댓가로 퍼스트파티로서의 특권을 보호해주기로 한 조약을 어겼다면서 닌텐도와 재판을 벌이게 된다. 닌텐도와 아타리의 재판은 이 재판 직후에 벌어진 것으로 닌텐도와 남코의 대리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타리 쇼크」라는 사건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어느 한 시점에서의 갑작스러운 붕괴가 아닌, 상당히 긴 기간 동안에 걸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이 겹치고 겹쳐서 만들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타리 쇼크」의 원인은 크게 7가지로 볼 수 있다.
①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시장의 공급 과잉
②플랫폼이라는 개념의 부재
③「E.T」、「팩맨」 등 대형 쿠소게의 실패로 인해 발생한 아타리사의 회계상의 적자
④1983년 이후 킬러 타이틀의 부재
⑤차세대기의 한발 늦은 등장
⑥워너 그룹의 경영 악화
⑦코모도스64, 애플II 등의 성장으로 인한 가정용 컴퓨터 시장의 확대
그 어느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동시다발적으로 상황을 악화시켰고, 그로 인해서 1982년에 30억 달러에 이르던 아타리의 매출은 1985년에는 1억 달러로 급감했다. 하지만 「아타리 쇼크」가 발생했다고 알려진 1983년은 1982년에 비해서 소프트웨어의 판매 실적이 상승했으며, 신작도 계속해서 발매되었다. 팔리지 않은 것은 소프트웨어가 아닌 아타리의 하드웨어였다. 그에 대해서 위의 7가지 원인을 중심으로 설명을 해보고자 한다.
①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시장의 공급 과잉
1980년대 초반의 미국은 지금처럼 유통망이 크게 발전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고가 떨어져도 곧바로 재입고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대형 소매점들은 분기 혹은 1년치 재고를 한꺼번에 쌓아 놓고 판매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런데 1982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타리는 VCS(비디오 게임 시스템)의 판매 예측을 매우 높게 잡는다. 얼마나 높게 예측했는지는 1982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발매된 「E.T」의 생산량이 600만개였다는 것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하드웨어의 공급량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뚜껑을 열자 예상만큼 하드웨어는 팔리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대부분의 가정이 VCS를 구매한 상태였고, 비디오 게임기 시장은 당시로서는 그렇게까지 폭발적으로 시장 규모가 확대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82년의 크리스마스 시즌의 각종 세일 등으로 그나마 아직 VCS를 사지 않았던 가정이 대부분 VCS를 구매하게 되었고, 이것은 1983년 이후에 발생해야 할 수요를 미리 당겨서 소모한 결과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아타리는 1983년의 하드웨어 수요를 낙관적으로 보고 생산량을 줄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더욱 많은 재고가 쌓이게 된다.
②플랫폼이라는 개념의 부재
아타리 VCS 시절에는 게임 플랫폼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서드파티들은 아타리의 간단한 승인만으로 게임을 만들 수 있었고, 아타리는 공급량 조절이나 발매일 조절 같은 서포트 업무를 하지 않았다. 기술 지원도 없었으며, 발매되는 소프트웨어를 검수하는 절차도 없었다. 서드파티는 그냥 게임을 만들어서 판매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조악한 품질의 소프트웨어가 범람할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유저들에 의한 평가 시스템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게임을 발매 전에 평가하는 정보지가 발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소비자는 그저 게임 패키지 디자인을 보고 게임의 내용을 상상해서 구매해야 했다. 이 때문에 소위 쿠소게라고 말하는 저질 소프트웨어가 범람하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런 저질 소프트웨어가 범람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말로 문제가 된 것은 이러한 저질 소프트웨어가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서드파티들이 게임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대량의 재고를 헐값에 판매했다는게 문제가 되었다. 당시의 서드파티 중에는 애완동물 사료를 만드는 회사나 시리얼을 만드는 회사도 있었는데, 이런 곳들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조악한 소프트웨어를 대량으로 생산해서 거액의 마케팅 비용을 들여 선전했다. 하지만 게임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잘 팔리지 않았고, 대량으로 남은 재고를 원 가격의 1/10 수준에 판매하게 된다. 이런 서드파티의 이탈이 1982년 크리스마스 시즌 이후로 두드러졌는데, 이로 인해서 소프트웨어의 전체적인 가치가 하락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들은 1982년 12월 소비자들이 “아타리 게임을 구입했지만 너무 재미없었다”고 집단으로 아타리를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진다.
③「E.T」、「팩맨」 등 대형 쿠소게의 실패로 인해 발생한 아타리사의 회계상의 적자
「아타리 쇼크」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E.T」의 경우 1982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약 600만개가 생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중 판매된 것은 약 100만개에 불과했고, 500만개의 재고가 남게 되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아케이드의 히트작인 「팩맨」도 1982년 3월에 VCS로 발매되었다. 이 「팩맨」은 이식 재현도가 매우 낮은 쿠소게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이 워낙에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700만개나 판매되었다. 이 700만개는 VCS에서 가장 많이 팔린 수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시 아타리 수뇌부는 VCS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이 「팩맨」을 살 것이라고 예상해 무리하게 추가 생산을 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팩맨」은 1200만개가 생산되어 700만개가 팔리고 500만개가 재고로 남았다.
그런데 미국의 유통 시스템은 팔리지 않은 재고를 제조사에 그대로 반품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1982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끝난 뒤 「E.T」와 「팩맨」만으로도 1000만개의 재고가 아타리사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돌아온 재고는 이 2개의 게임만이 아니었고, 아타리사는 이러한 처치 불능의 재고들을 캘리포니아의 사막 한가운데에 전부 매장해버린다. 이른바 「E.T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아타리는 이렇게 반품되어 돌아온 소프트웨어를 전부 손실 처리했고, 1982년 4/4분기 회계에 반영해버린다. 이 때의 경영 지표는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 경영 실적이 발표된 직후 아타리와 워너의 주식은 폭락하게 되고, 이것이 아타리사의 구조조정으로 이어져서 많은 개발자들을 쫓아내게 된다.
④1983년 이후 킬러 타이틀의 부재
1982년 크리스마스 시즌 이후의 서드파티들의 이탈, 경영 실적 악화에 따른 구조조정으로 많은 개발자들을 내보내는 등의 악수로 인해 아타리는 좋은 게임을 만들 직원들을 대부분 잃는다. 이로 인해서 킬러 타이틀을 만들어 낼 수 없게 되면서 점차 시장 지배력을 잃게 된다.
⑤차세대기의 한발 늦은 등장
아타리의 창업자인 놀런 부쉬넬은 1980년에 차세대기를 발매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워너에 의해서 자기 회사에서 쫓겨났다. 워너는 잘 팔리는 VCS의 후속기를 그렇게 빠르게 내놓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1982년까지는 VCS가 불티나게 팔려나갔기 때문에 굳이 차세대기를 내놓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이 결과적으로 기존 VCS 유저들이 차세대기로 업그레이드 할 타이밍을 놓치게 하고, 많은 유저들이 코모도스64, 애플II 등의 가정용 컴퓨터로 이동하게 된다.
뒤늦게 나온 차세대기는 아타리2600과의 호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능면에서 많은 희생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서 경쟁 제품이었던 닌텐도의 NES에 완전히 시장 지배력을 빼앗기게 된다.
⑥워너 그룹의 경영 악화
워너는 이 시기에 여러가지 문제들이 겹치면서 경영이 악화되었는데, 워너의 회장이었던 스티브 로스는 누군가에게 이 책임을 떠넘겨야 했다. 그 타깃으로 지목된 것이 당시 아타리의 사장이었던 레이 키사르를 내부거래 등의 혐의로 해임해버린다. 레이 키사르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아타리를 크게 성장시킨 일등공신이었는데, 1983년의 실적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나게 되면서 아타리는 선장을 잃는다.
⑦무리한 신규 사업 진출
1983년 이후로 코모도스64가 크게 유행하고, 이후 홈컴퓨터 시장이 성장하면서 게임밖에 할 수 없는 1970년대말에 발매된 성능 떨어지는 아타리 VCS는 점차 팔리지 않게 된다. 그런 상황이다보니 아타리는 1984년부터 홈컴퓨터 사업에 진출해 1985년에 「아타리ST」라는 홈컴퓨터를 내놓는다. 이 「아타리ST」는 경쟁사였던 코모도스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서 만들었는데, 당시로서는 희귀한 MIDI를 기본 내장한 컴퓨터였다. 하지만 아미가와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결과적으로 「아타리ST」는 크게 실패한다. 이 당시의 홈컴퓨터 개발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리스크가 큰 사업이었다. 1983~1985년 사이에 아타리는 그 외에도 여러 신규 사업분야에 진출했는데 대부분 이렇다할 실적을 내지 못했고, 그 손실은 아타리를 강하게 압박했다.
흔히 「아타리 쇼크」로 불리는 ‘North American Video game crash of 1983’라는 현상이 「게임 시장에 조악한 품질의 소프트웨어가 범람하는 것을 막지 못해 유저들이 게임 시장으로부터 등을 돌려 시장이 붕괴한 사건」이라는 개념으로 정착된 것은 일본, 특히 닌텐도의 영향이 매우 강하다.
당시 닌텐도의 사장이었던 고 야마우치 회장은 1983년부터 1985년 사이에 벌어진 시장의 급속한 붕괴를 보면서 많은 교훈을 얻는다. 그는 이 사건이 수요 예측과 공급 조절 실패에 원인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아타리가 잘못한 점을 따라하지 않는 것을 가장 큰 과제로 삼는다. 그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 초심회와 마리오 클럽이다. 유통량을 조절하고, 소프트웨어의 품질 체크를 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패미콤의 대성공으로 발언권을 얻게 된 야마우치 회장은 많은 공식 석상에서 아타리의 실패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조제남조(粗製濫造)’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조악한 품질의 제품이 범람한다는 의미다. (참고-야마우치 회장의 어록 http://crossing.blog.eonet.jp/blog/yamauchi.html )
그럼 실제 아타리 쇼크는 어떤 것이었는가를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아타리는 1977년에 아타리2600(통칭 VCS)이라는 가정용 게임기를 내놓는데, 이것은 롬 카트리지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매우 획기적인 형식이었다. VCS는 발매 직후부터 크게 히트했고, 창업자였던 놀런 부쉬넬은 회사를 더 크게 성장시키기 위해 아타리를 워너 그룹에 매각한다. 이렇게 되면서 워너에서는 기업 관리를 위해서 레이 키사르라는 전문 경영자를 아타리사에 보낸다.
당시의 아타리는 창업자인 놀런 부쉬넬의 영향도 있고, 서부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강해서 놀면서 일하는 회사였다. 능력 있는 프로그래머들은 밤에 나와서 밤새도록 일하고 아침에 퇴근하기 일쑤고, 회사에서는 근무 시간에 일상적으로 술을 마시거나 대마초를 피우면서 일했다. 옷차림은 모두 티셔츠나 반바지 차림이었고, 회사에 규율이나 근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사내 분위기가 아타리를 더 크게 성장 시키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레이 키사르는 좀 더 회사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제대로 된 회사 경영과 관리를 하게 된다. 이러한 당시 상황은 레이 키사르 본인의 인터뷰( http://masterfarseer.blogspot.kr/2015/04/ceo.html )에 자세히 나와 있다.
아타리는 1980년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이식판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히트작을 연달아 내면서 연간 수익 30억 달러에 이르는 공룡으로 성장한다. 그 과정에서 차세대기 개발 스케줄에 대한 의견 충돌로 창업자인 놀런 부쉬넬은 회사를 떠난다. 규율을 강조하는 레이 키사르의 방식에 불만을 품은 핵심 개발자들도 여럿 아타리를 떠났다.
아타리의 급속한 성장, 가정용 게임시장의 과열은 당시 게임과는 전혀 무관했던 여러 회사들의 게임 참여를 유도하게 된다. 시리얼 제조사나 애완동물 먹이를 만드는 회사도 게임을 개발할 정도로 과열된 상태였다. 당연히 이런 회사들이 만드는 게임들의 품질은 매우 조악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타리나 액티비전 같은 주요 개발사들이 만드는 게임들의 퀄리티는 나쁘지 않았고, VCS은 여전히 잘 팔리고 있었다.
그런데 노하우가 없는 쿠소게를 양산한 개발사들은 다른 의미에서 악영향을 주게 된다. 시리얼 제조사나 애완동물 먹이 만드는 회사들은 자금만은 풍부했기 때문에 쓰레기 같은 게임을 개발했으면서도 많은 물량을 찍어냈다. 하지만 게임이 재미없었기 때문에 잘 팔리지는 않았다. 그로 인해 대량의 악성 재고들을 만들어 내고, 게임 사업에서 철수하거나 혹은 도산한 개발사들의 소프트들이 지나치게 싼 가격에 매장에서 팔리게 된다. 그 바로 옆에는 신작 소프트가 제값에 팔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무분별하게 서드파티가 늘어나면서 하드웨어의 구조가 공개되어 버린다. 이로 인해서 VCS는 불법 복제 소프트에 시달리게 된다. 프로텍션 개념이 약했던 당시로서는 불법 복제를 막을만한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불법 복제의 범람으로 양질의 게임을 만드는 개발사들의 수익은 악화 되어 갔다.
그리고 서드파티까지 가세해 너무나 많은 카트리지를 생산하게 되면서 각종 부품(특히 칩)의 가격이 공급 부족으로 크게 상승하게 된다. 이로 인해서 카트리지의 제조 단가가 상승하면서 점차 수익성이 악화되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칩 생산을 할 수 있는 회사가 많지 않았고, 수율도 나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압박을 준 것이 불법 복제와 부품 수급의 문제였다. 불법 복제로 인해서 히트 소프트라고 해도 스테디 셀러가 되기는 힘들었고, 일단 복제품이 나오기 전에 최대한 많이 팔아야만 했다. 다시 말해서 초기 물량을 많이 뽑는게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품 수급의 문제로 인해서 추가 생산이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매출에 타격을 입는 사태도 발생한다. 특히 매장들에서는 재고가 빠르게 추가로 공급되지 않아서 손해를 본다는 이미지가 강해졌다.
이러한 흐름으로 인해서 1982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매장들은 최대한 해당 시즌의 판매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양의 재고 확보를 필요로 하게 되고, 아타리에 대량의 재고를 확보해줄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워너의 회장이었던 스티브 로스는 스티븐 스필버그로부터 2500만 달러에 E.T의 게임 판권을 구매한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서 게임을 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것이 잘 알려진 바로 그 아타리판 「E.T」다. 스티브가 게임 제작을 의뢰한 것이 8월, 발매는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부품 수급이나 배송 등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실제 게임 개발은 10월까지 완료되어야 했고, 실제로 주어진 개발 기간은 단 5주에 불과했다. 당연히 레이 키사르를 비롯해 아타리 직원들 모두가 반발했지만, 회장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어 이 게임의 개발은 사내에서 가장 뛰어난 개발자였던 하워드 스콧 워쇼(Howard Scott Warshaw)가 담당하게 된다.
하워드의 초인적인 능력은 불가능할 것 같은 「E.T」의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아타리는 이 게임을 무려 600만개 제조한다. 당연히 이 정도 물량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칩을 무리하게 수급하면서 제조 단가는 올라갔다. 그렇게 만든 600만개 중 약 100만개가 판매되었다. 악성 재고가 500만개 남게 되었다. 같은 해 1200만개를 찍어 700만개 팔린 「팩맨」을 합치면 1982년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1000만개의 악성 재고가 남았다.
미국은 판매점에 남은 재고를 제조사에 반품을 할 수 있다. 아타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1000만개의 게임 카트리지를 반품 받았고, 「E.T」와 「팩맨」 등을 비롯한 1982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과잉 생산했던 소프트들의 손실을 1982년 4분기 재무재표에 반영했다. 회계상의 엄청난 손실이 찍힌 것이다.
이것이 미국 전역에 보도되면서 아타리와 워너의 주가는 폭락을 거듭한다. 이런 이미지 추락은 당연히 아타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쪽 모두의 판매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만 해도 게임기는 완구로 취급 되었기 때문에, 게임을 하는건 아이들이지만 구매는 부모가 했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기업 이미지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아타리라는 플랫폼 자체가 1983년 이후로 급속하게 붕괴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아타리 쇼크」라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규모가 지나치게 커진 가정용 게임기 시장의 버블이 붕괴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버블 붕괴의 원인이 조악한 소프트웨어의 범람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여러 요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당장 꼽을 수 있는 원인만도 위에 제시한 7가지가 있다. 「아타리 쇼크」라는 현상이 발생하는 흐름 속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조악한 소프트웨어들이 아니라 스티브 로스 워너 회장의 잘못된 경영 판단이었다. 아타리 쇼크는 그러니까 플랫폼을 관리하는 시스템의 부재와 버블 붕괴라는 2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2014년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Atari Game Over」는 아타리 쇼크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지상최악의 쓰레기 게임 「E.T」의 재고 수 백만 개가 사막에 매장 되었다는 도시전설, 일명 「E.T의 무덤」을 찾아 실제로 발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E.T를 발굴하면서 아타리의 역사를 함께 조명하는데, 놀런 부쉬넬을 비롯해 당시의 관계자들 대부분이 직접 나와서 인터뷰를 했다.
이 영화에는 매우 특별한 인물이 한명 나오는데, 바로 영화의 주인공격이라고 할 수 있는 「하워드 스콧 워쇼」다. 그는 영화에서 발굴하고자 하는 「E.T」를 만든 개발자이다.
하워드는 아타리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칭송받는 「야의 복수(Yars’ Revenge)」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천재적인 프로그래머이자 기획자였던 하워드였지만, 아타리를 나온 뒤 그에게는 「E.T의 개발자」, 「아타리를 파멸시킨 장본인」 같은 꼬리표가 따라붙었다고 한다. 오명을 뒤집어 쓴 탓에 게임 업계에서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영상제작을 공부해서 영상 제작자로 활동하기도 한다. 이후에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몇 개의 학위를 더 따고 임상심리사 자격도 취득해서 현재는 하이테크 업계 종사자를 대상으로 하는 전문 카운셀링 프로그램을 운영중이다.
좋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낸 어떠한 현상에 대해서 그 책임을 누군가 한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이해하기도 쉽고, 그게 재미있기도 하고, 생각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로 인해 사건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아니었던 그 누군가의 삶이 망가지는 경우도 있다. 그게 급성장하던 게임산업 전체를 붕괴시킨 책임 정도가 되면 한 사람의 개인이 감당할 무게를 넘어서게 된다.
불과 5주 만에 개발해 정해진 날짜에 무조건 출시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일을 떠맡은 사내 최고의 실력자.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오명만 뒤집어 쓴 한 남자의 불행에 잠시나마 미안한 마음을 가져보자.
참고 사이트
http://en.wikipedia.org/wiki/Atari_5200
http://www.giantbomb.com/atari-5200/60-67/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best-selling_game_consoles
http://en.wikipedia.org/wiki/Pac-Man_%28Atari_2600%29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Atari_2600_games
http://en.wikipedia.org/wiki/ColecoVision
http://www.ign.com/articles/2008/08/26/top-10-best-selling-atari-2600-games
http://ja.wikipedia.org/wiki/E.T. (アタリ2600)
http://ja.wikipedia.org/wiki/アタリショック
http://en.wikipedia.org/wiki/North_American_video_game_crash_of_1983
http://www.wdic.org/w/MOE/アタリショック
https://en.wikipedia.org/wiki/Howard_Scott_Warshaw
https://ja.wikipedia.org/wiki/アタリ_(企業)#Atari2600.E3.81.A8.E3.83.AF.E3.83.BC.E3.83.8A.E3.83.BC.E3.81.AE.E6.82.B2.E5.8A.87
http://nesgbgg.seesaa.net/article/113713062.html
http://gmdisc.com/archives/1409
http://crossing.blog.eonet.jp/blog/yamauchi.html
http://masterfarseer.blogspot.kr/2015/04/ceo.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