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릭 가전
일본에서 만들어진 ‘제네릭 가전(ジェネリック家電)’이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특허가 끝난 의약품을 복제해 판매하는 ‘제네릭 의약품’에서 유래된 조어로, 「플레이보이」 일본판의 필자로 활동하던 유통 저널리스트 ‘치카카네 타쿠시(近兼拓史)’가 만들어낸 말입니다. 대형 전자제품 메이커가 내놓는 고가의 제품들과는 달리 한 세대 전의 기술을 활용해 심플한 기능만을 구현한 저가의 가전제품을 의미합니다.
다이얼 방식의 타이머만 달려 있는 전자렌지, 부가 기능이 전혀 없이 채널 선택과 HDMI 입력 단 1개만 있는 텔레비전, 냉장실 밖에 없는 100리터의 냉장고, 기본적인 세탁과 탈수만 되는 세탁기 등 최신 기술이나 부가적인 기능도 없고 디자인도 투박한 해당 전자제품의 기본적인 기능에만 충실한 제품들입니다. 일본에서는 돈키호테 같은 잡화점이나 인터넷 쇼핑몰에서 이러한 제품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모니터나 텔레비전, 청소기, 다리미 등 특정 제품군에서만 중소기업 제품을 찾아볼 수 있는데 비해서 일본은 거의 모든 분야에 제네릭 가전 제품이 존재합니다.
제네릭 가전은 한국에서 생각하는 중소기업 제품이나 저가의 중국산 가전제품과는 조금 다른 탄생 배경을 갖고 있으며, 시장에서 차지하고 있는 포지션도 조금 다릅니다. 제네릭 가전 업계의 주요 메이커 중 하나인 ‘아이리스오야마’의 연간 매출이 3,030억엔(약 3조원), ‘후나이 전기’가 2,171억엔(약 2.1조원), ‘오리온전기’가 2,000억엔(약 2조원)인데요. 매출액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네릭 가전 업체라고 해서 중소기업이라는 고정 관념은 일단 접고 들어가야 합니다.
제네릭 가전의 탄생 배경
제네릭 가전은 일본의 장기 불황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80~90년대에 전세계를 정복했던 일제 가전제품들은 일본의 버블 경기 붕괴, 한국과 중국 업체들의 성장, 장기적인 엔고 상황 등에 의해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잃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90년대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정리해고 되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한국이나 중국의 가전 메이커로 자리를 옮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에 남아야 했고, 그들 중 일부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게 됩니다. 이런 엔지니어들을 중견 제조업체가 흡수하면서 탄생하게 된 것이 제네릭 가전입니다.
가전제품 업계는 신기술의 경쟁이 매우 치열한 곳이지만, 의외로 신기술이 대거 투입된 신제품을 고가에 사고 싶지 않다는 소비자의 니즈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가전제품 업계의 주요 메이커들은 최소한의 기능만을 담은 저가의 상품을 만들어내기에는 어려운 입장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기능의 값싼 제품을 원하는 소비자의 니즈를 만족하기 어려웠습니다. 바로 이런 니즈를 파고 들기 시작한 것이 제네릭 가전입니다.
한국이나 중국의 가전제품이 일본 가전제품보다는 저렴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외산 가전제품은 일본인이 원하는 수준의 품질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제품들이 비싼 것은 단순히 제조 원가가 비싸기 때문은 아닙니다. 대기업 중심의 경쟁 체제였기 때문에 신기술 개발과 광고 마케팅에 너무 많은 돈을 쏟아 부어야 했고, 조직이 너무나 비대해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수익을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그에 따른 부가가치를 창출해야만 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가격이 높게 책정된 측면이 강합니다. 하지만 제네릭 가전은 그럴 필요가 없이, 오로지 필요한 기능만 구현하고 디자인이나 포장에도 개발비를 쓸 필요가 없으니 더 값싼 가격에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대형 가전 메이커들은 상품 개발의 사이클이 매우 짧아서 한 세대 전의 부품이나 기술은 다음 세대 제품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한 세대 전 기술을 제네릭 가전 메이커에 값싸게 판매하고 있고, 이를 통해서 대기업은 최신 기술의 고성능 제품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 되면서 제네릭 가전 메이커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20조원의 거대한 시장
일본의 제네릭 가전 시장 규모는 2015년 현재 약 2조엔(20조원) 정도입니다. 한국의 전자제품 전체의 시장 규모가 약 28조원 정도인 것을 생각할 때 엄청난 규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리스오야마를 시작으로 다양한 제네릭 가전 메이커들이 다양한 제품을 제조하고 있으며, 그 규모도 작지 않은 편입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회사명 | 회사 개요 | 매출액 | 주요상품 |
---|---|---|---|
아이리스오야마 | 플라스틱 제품 종합 제조 메이커 | 3,030억엔 | LED조명, 진공청소기 |
후나이전기 | OEM 제조 전문 메이커 | 2,170억엔 | TV, VHS, DVDP |
오리온전기 | OEM 제조 전문 메이커 | 2,000억엔 | TV, VHS, DVDP |
야마젠 | 생활용품 종합 제조 메이커 | 3,062억엔 | 난방기구, 선풍기 |
옴전기 | 소형 전기 제품 제조 메이커 | 237억엔 | 라디오, 음향기기 |
TESCOM | 헤어드라이어, 믹서기로 유명 | 126억엔 | 드라이어, 믹서기 |
코이즈미성기 | 뷰티 가전 메이커로 유명 | 920억엔 | 미용기구, 토스터 |
토요토미 | 스토브 전문 제조 메이커 | 120억엔 | 계절가전 |
트윈버드공업 | 홈베이커리 분야 1위 업체 | 123억엔 | 조리기구, 청소기 |
아사히전기(ELPA) | 소형 전자제품 전문 메이커 | 210억엔 | 리모컨, 멀티탭 등 |
CSME | 할로겐 히터 | – | 할로겐 히터, 선풍기 |
에스케이저팬 | 포터블 플레이어, 스피커로 유명 | – | 포터블 블루레이플레이어 |
도우시샤 | 산스이, 오리온 등의 판매회사 | 992억엔 | 가습기 |
MOASTORE | MAXZEN 브랜드로 유명 | – | TV, 전자렌지, 세탁기 |
위 업체들은 물론 제네릭 가전만을 만드는 업체들은 아닙니다. 아이리스오야마의 경우 플라스틱 제품 제조 분야의 대기업 중 하나로 플라스틱 케이스, 샴푸통 등에서 독보적인 쉐어를 가진 회사이고, 제네릭 가전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까지 큰 것은 아닙니다. 후나이전기나 오리온전기도 자사 브랜드의 제네릭 가전에도 힘을 쏟고 있지만, 지금도 사업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OEM 제품 생산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크고 작은 메이커들을 모두 합치면 시장 규모는 2조엔이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규모라는 이야기죠. 일본의 가전 시장 전체 규모가 약 67조엔인데, 이 중 약 3% 정도가 제네릭 가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매우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일본의 청량음료 시장이 약 4조엔 정도 규모인 걸 생각하면 굉장히 큰 시장입니다.
싸게 만들 수 있는 이유
제네릭 가전이 대기업 가전 제품에 비해서 저렴한 가격에 판매될 수 있는 이유는 한 세대 전의 기술 사용, 필요한 기능만 탑재, 디자인에 비용을 쓰지 않고, 포장에 비용을 쓰지 않고, 광고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합니다. 특허를 공유해서 기술개발 코스트를 낮추는 것은 물론이고, 일부 제품의 경우 버려진 가전 제품의 부품을 재활용하여 새로운 제품을 만들기도 한다고 합니다.
일본은 가전제품을 버릴 때 반드시 리사이클권을 구매해서 버릴 가전제품에 붙여서 버려야 하는데요. 이때 수거된 가전제품은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리사이클 전문 공장으로 보내져 부품 단위로 분해되어 재이용이 됩니다. 전자레인지의 마이크로웨이브를 만들어내는 마그네트론 같은 경우는 같은 회사 제품은 거의 모든 제품에 동일한 부품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자레인지에서 가장 비싼 부품이 마그네트론이고, 출력 고정에 타이머 이외에는 기능이 없는 전자레인지는 마이네트론의 부품 가격이 다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비싸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통 특정 회사의 버려진 전자레인지를 베이스로 새로운 저가형 전자레인지를 만드는 방식으로 제조 원가를 극한으로 낮춘다고 합니다. 물론 대기업이 이렇게 했다가는 큰 문제가 되겠죠.
나 홀로 제네릭 가전 브랜드 UPQ
일본에는 작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전자제품 브랜드가 있습니다. UPQ(업 큐)라는 브랜드로 사원은 CEO인 나카자와 유코라는 32세의 여성 1명이 전부인 곳이죠. 하지만 2016년 7월에 설립된 이후 지금까지 30개 정도의 제품을 런칭한 회사입니다. 해드폰부터 액정TV, 디지털카메라, 안드로이드 휴대폰, 블루투스 키보드, 이어폰, 스마트 전구 등 다양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나카자와 유코 씨는 원래 카시오에서 휴대폰 개발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카시오는 NEC와 합병해 NEC카시오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즈라는 회사가 되었다가, NEC카시오가 스마트폰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당시 개발자들 일부만 쿄세라에 흡수되고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나카자와 씨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입니다.
하지만 본래 카시오에서 상품 개발을 담당했었기 때문에 부품 메이커나 공장, 유통업체 등에 충분한 인맥이 있었고, 자기 혼자 가전제품 회사를 설립한 뒤 상품 기획은 카시오 시절의 OB들에게 외주로 맡기고, 이렇게 만들어진 상품 기획을 중국의 위탁 제조 전문 업체에 맡겨서 소량만 생산해 가전 양판점과 대형 마트 위주로 판매하여 짧은 기간에 다양한 제품군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최초로 런칭했던 블루투스 해드폰과 75,000엔짜리 50인치 4K 디스플레이는 폭발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리고 안드로이드 휴대폰인 UPQ A01은 일본 메이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이었기 때문에 망재판매 사업자들을 통해서 상당히 많이 보급이 되었습니다. 이 휴대폰의 히트 덕분에 CEO인 나카자와 씨는 한동안 각종 미디어에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기도 했습니다.
UPQ가 만드는 제품들은 성능은 별로지만, 중국제 제품이나 다른 제네릭 가전 제품들에 비하면 비교적 디자인이 세련된 것이 특징입니다. 회사에 직원이 CEO 한 명 뿐이고, 상품 기획 및 디자인 등은 모두 외주나 아르바이트이기 때문에 조직을 운영하는 코스트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싸게 팔 수 있는 것이고요. 물론 이제는 너무 상품군이 많아지고, 매출도 늘어났는지 1월부터 직원을 뽑고 있긴 하더군요.
메이드 인 저팬의 미래는?
최근 일본을 대표하는 가전 업체들이 하나 둘 무너지고 있습니다. 제가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고 상품도 좋고, 물건도 안 팔리는게 아닌데 경영진의 큰 삽질과 그걸 감추려는 회계부정 때문에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 사실상 망해버린 도시바는 원자력 사업에서 입은 막대한 손실로 인해 어떻게 손을 쓸 방법도 없이 한방에 망해버렸고, 샤프도 경영진이 초대형 액정 생산을 위해 무리하게 공장 짓고 태양광전지 사업 하다가 회사가 한방에 망해버렸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샤프가 도산 할지도 모른다는 뉴스가 연일 흘러나오던 2015년 5월, 갑작스럽게 샤프가 보도자료를 뿌리면서 회심의 한방처럼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초 고화실 4K 80인치 액정 텔레비전 7월 출시” 소식을 보며 얼마나 많은 비웃음을 샀던지. 판매 가격 168만엔. 한국 돈으로는 1680만원, 40인치 액정 TV가 100만원도 안 하는 시대에 그런 초고가 제품을 반전을 노리는 상품으로 내놓는 무신경에 많은 사람들이 썰렁한 반응을 보였었습니다.
이렇듯 메이드 인 저팬을 대표하던 브랜드들이 쓰러져가는 반면, 한쪽에서는 소형 가전 중심으로 제네릭 가전 브랜드들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시장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매년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가전 제품 시장의 큰 축을 담당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선풍기와 토스터로 유명한 발뮤다도 처음에는 X-Base라는 노트북 냉각 받침대로 시작한 제네릭 가전 메이커니까요.
너무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b
세탁기나 에어컨 구매를 위해 가전코너를 돌아다니면서 늘 원하던 바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저 여성분은 직접 실천해버렸군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에 꼭 등장해야 할 비즈니스라고 생각합니다.
제품디자이너의 꿈을 상품기획자가 실현하고 계시는군요 그것도 젊고 여성분이…용기가 대단하고 지금까지의 성공에 찬사를 보냅니다.